50년 동안 전기계를 지켜온 제1세대 전기인
비츠로그룹의 장순명 명예회장은 우리나라 전기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제1세대 전기인이다. 1954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에 배움의 길을 찾아 무작정 상경한 가난한 고학생이었던 그가 50년이 지난 지금은 첨단 VCB진공차단기, 개폐기, 보호기, 감시제어반, 리튬전지 등을 만드는 기업의 700여명 대가족을 이끌고 있다. 현재 비츠로의 기업군에는 변전, 배전자재, 기기전문메이커인 비츠로테크를 모기업으로 자동화와 환경기업인 비츠로시스, IT전문업체인 비츠로컴, 에너지전문기업 비츠로셀, 중국에 설립한 우시비세룡기전유한공사 등이 있다. 비츠로테크와 비츠로시스는 코스닥 등록기업으로 비츠로는 대기업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는 내실 있는 중견기업이다. 50년 동안 전기업이라는 한길만을 고집해온 그에 대해 강직하고도 뚝심 두둑한 경영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일곱살 무렵 아버지를 따라나선 군산에서 처음으로 전깃불을 본 감동을 아직도 가슴에 간직한 순수한 전기인으로 소개되길 원할지도 모른다. 결실의 계절인 가을 어느 날, 성수동에 자리한 비츠로그룹의 본사를 찾아 ‘장락무극(長樂無極)’의 인생을 살고 있는 그를 만나보았다.
잔잔한 인생이 진정 즐겁다
최근에 장순명 명예회장은 ‘장락무극’이라는 자서전을 펴냈다.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아 사사(社史)를 정리해보자는 장순상 회장의 권유에 마지못해 책을 써냈다는 장 명예회장. 그는 처음에는 가난하고 비참한 시절의 이야기를 쓰는 게 무슨 읽을 거리가 되겠냐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막상 책이 나오고보니 젊은 직원들과 이야기할 때 화제거리가 하나 더 늘었다며 흐뭇해한다.
특별히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다고 스스로 말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열악한 한국전기의 태동기와 초창기 전기산업의 발전사를 엿볼 수 있다.
그는 굴곡 많은 인생보다 잔잔한 인생이 진정 즐겁다는 ‘장락무극’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한해에도 수많은 기업들이 생겨났다가 하루 아침에 힘없이 무너져내리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경쟁력 있는 기업을 키워온 그에게 무리한 경쟁보다는 언제나 정도를 찾아가려는 그의 뜻과 같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연히 시작된 전기와의 인연
그는 1931년 충남 부여의 현미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방이 된 다음해인 1946년 중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의 배움의 길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어렵사리 중학교를 졸업한 그는 더 배우겠다는 꿈을 안고 1953년 서울로 향했다. 그렇게 시작된 서울에서의 생활은 학비를 벌어야한다는 절박감으로 이일 저일 가릴 여유가 없었다. 그렇게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찾아간 곳이 수동 볼반, 바이스, 쇠톱만으로 전기 개폐기인 나이프 스위치를 만드는 ‘우광’이라는 공장이었다. 50년전 초창기 전기기기 제조는 조악하기 그지 없었다. 나이프 스위치도 대리석판을 대충 잘라서 구멍을 뚫고, 황동 주물에 납을 녹여서 동판을 때워 일본 전기회사들의 그것을 흉내내서 만들었던 게 고작이었다.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는 교복 입은 가난한 고학생의 전기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저 먹고 살고, 학비를 벌기 위해 시작한 공장일’은 어느새 업계에서 금방 소문이 났다. 무슨 일이든 꼼꼼하게 해내는 성격 덕분이었는지 얼마 후 그는 전기 개폐기 제조업분야에서 교복을 입은 학생사장으로 통하게 되었고 학생 신분으로 결혼도 했다. 또 다음해에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늘어나는 일감 때문에 직원도 고용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광명전기’의 터를 잡게 되었다.
황무지에서 자란 꽃은 옥토에서 자란 꽃보다 아름답고 오래 간다
‘광명’은 전기의 힘을 표현한 가장 단순한 이름이라고 장 명예회장은 설명한다.
전기나 빛은 세상을 밝히는 이로운 도구로 사용될 때에 이기(利器)가 되지, 사람이나 생활에 해를 끼치면 그 무엇보다 무서운 재앙이 된다. 전기에는 늘 화재의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전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생명에 대한 겸허함을 갖고 있어야하고, 안전 의식이 투철해야한다는 게 그의 철학이다. 또 그는 회사 이름에 자신의 이름 끝자인 ‘밝을 명’을 넣어 회사와 함께 꿈을 키웠다.
“나를 비롯해 광명의 식구라면 누구나 이 곳에서 평생을 먹고 살면서 꿈을 키워나갈 수 있는 회사가 되었으면 해. 기업이란 결코 경영주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거든. 간판을 걸고 기업으로 출발하면 그것은 이미 사회의 한 부분이지. 사장은 단지 조직의 구심점일 뿐야. 회사는 사회에 공헌하고 직원들의 삶을 행복하게 해줄 때 그 의미가 있는 거지, 사장 개인의 배를 불리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되거든.”
과감한 투자와 몇번의 좌절
비츠로의 꾸준한 성장은 경영주의 무리 없는 기업 경영과 기술개발을 위한 과감한 투자, 인재양성에서 그 비결을 찾을 수 있다.
비츠로는 국내기술이 열악한 수준이었을 때 기술국산화를 목표로 외국과 기술제휴를 맺어 선진기술화하고 직원들의 해외파견과 유학 등 인재양성을 통해 동종업계 1위에 올랐다.
전기업계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라고는 하지만 광명은 80년대까지도 영세한 규모였다. 대기업은 뒤늦게 전기업계에 뛰어들었지만 막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외국에서 기술을 사와 빠르게 성장해갔다. 그러는 사이, 단순 조립기술만 있으면 되는 배전반과 분전반에는 중소기업이 앞다투어 뛰어들었다. 단순히 ‘품질제일’만으로는 지각변동을 겪어내기 힘들었다.
장 명예회장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진공차단기가 상용화되지 않았어. 하지만 진공차단기는 기름을 쓰지 않기 때문에 기존 차단기에 비해 기름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화재 위험이 적고, 구조도 간단해 보수가 쉽지. 틀임없이 진공차단기로 대체될 거라는 확신이 섰어. 그래서 일본으로 가서 아마다 펀칭 머신을 도입해왔지.”
당시 다른 업체에서는 과잉투자라고 비웃었다고 한다. 직원이 30명이었고 1년 매출이 10억원인 중소기업에서 10억원짜리 펀칭머신을 도입한다는 게 무모한 짓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광명으로서는 역사적인 사건이 되었고, 회사는 한단계 도약하게 되었다.
이렇듯 과감한 투자로 기업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지만 좌절도 있었다. 장 명예회장은 모기업인 광명전기의 매각과 비츠로컴의 시티폰 사업 좌절, 값비싼 대가를 치른 중국진출의 성과미흡을 사업의 실패사례로 꼽았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자동차사고로 6개월간 병상에 누워있던 시절도 있었고, 조급한 마음에 환자복 차림으로 공장을 돌리다 그라인더가 튀어 한쪽 눈을 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많은 거래처의 지인과 평생의 반려자인 아내 덕분에 이 위기를 극복했고 남은 생을 타인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앞으로도 늘 사회 속에서 함께 숨쉬는 친구같은 기업으로
비츠로는 ‘광명’이라는 이름을 영문으로 표기한 상호다. 장 명예회장은 비츠로가 ‘작지만 빛나는 기업’으로 세인들에게 기억되길 바란다.
천천히 성장해가는 기업으로 누구에게나 신뢰를 주는 기업을 만드는 것이 100대 재벌이니, 고속 성장 신화나 눈앞의 성공보다 더 의미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조금 돌아가면 어떻고 조금 늦어지면 어떻겠냐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는 “앞으로도 비츠로가 그저 묵묵히 전기업계를 지켜왔고, 한발한발 기술개발에 승부를 걸면서 지켜온 지난 50년처럼 그렇게 촉촉히 스며들어 삶의 젖줄이 되는 기업으로 성장해가길 바란다”고 말한다.
글_김기숙 팀장 / 사진_정유선 기자·비츠로그룹 경영전략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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