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경력의 발전 플랜트 전문가 이은희 PM
“아직도 ‘프로젝트’라는 단어에 가슴이 설렙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중동 및 세계 곳곳의 불모지대에 플랜트를 건설하는 엔지니어들의 사진을 보고 꿈을 키워온 이은희 씨는 엔지니어링 업계에 발을 들인 후 35년간 세계 여러 나라에서 플랜트 건설에 앞장서 왔다. 지난해에는 네팔 히말라야의 라르케피크(6249m) 등반에 도전하기도 했다. 전혀 다른 분야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비슷한, 플랜트와 히말라야 등반이라는 ‘프로젝트’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들어보았다.
취재 곽정혜 기자
사진 제공 이은희
멕시코 Norte II 복합화력발전 프로젝트 수행 중 플랜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 이은희 씨 산업 분야에서 흔히 쓰는 플랜트(plant)는 ‘생산을 하는 일련의 기계나 공장 따위의 시설이나 설비 시스템’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기계, 장치, 건물, 자재 등이 집합되어 있는 곳을 플랜트라고 하며, 우리나라 「산업기본법」에서는 ‘산업설비’라고 부른다.
플랜트는 제품 생산에 필요한 설비나 시설 등의 하드웨어(hardware)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공정 기술과 운전정비 및 운영관리가 포함된 모든 소프트웨어(software)까지 포함한다. 플랜트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제품 생산공정·기술 ▶경제적으로 건설된 시설, 설비, 장치 ▶안전하고 안정적인 운영기술 ▶경제적 생산원가 등의 요소들이 골고루 갖추어져야 한다.
바레인 Muharraq STP 프로젝트 수행 당시 현지 관계자들과 함께. 그는 현장에서 팀원들과의 긴밀한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플랜트만 바라보며 걸어온 35년 외길
35년간 국내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플랜트 건설에 앞장서온 이은희 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플랜트 전문가’다.
중학교 2학년 무렵, 당시 해외 프로젝트에 진출한 대기업에 근무했던 누나의 영향으로 그는 엔지니어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누나가 매달 집으로 가져오는 그룹 사보(社報)를 통해 중동의 사막과 세계 곳곳의 불모지대에 플랜트를 건설하는 엔지니어들의 사진을 보며 ‘자부심과 긍지를 느낄 수 있는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 생기니 가야 할 길이 보였다. 이후 공업고등학교 및 공과대학으로 진로를 정하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ROTC 장교로 입대한 군대에서는 미사일, 레이다, 전차를 정비하는 기술 장교에 지원했다. 긍정적인 사고와 성실 그리고 책임감을 생활신조로 여기는 그이기에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는 병과학교 수료 시 최우수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전역 후 1989년에 코오롱엔지니어링(現 코오롱글로벌)에 입사한 이 씨는 현재까지 약 35년간 세계 여러 나라에서 플랜트 건설에 앞장서며 엔지니어로서의 외길을 걸어왔다.
플랜트 프로젝트의 꽃, 프로젝트 매니저(PM)
첫 직장에서 전기·제어 설계 및 공사팀장으로 일하며 현장감을 익힌 그는 1994년 삼성 E&A(前 삼성엔지니어링)로 회사를 옮겨 상하수도, 소각로 등의 관급공사 프로젝트와 함께 국내외를 오가며 삼성 관계사들의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수행하게 되었다.
정유, 발전, 소각로, 이차전지, 상하수도 등 국내외의 다양한 플랜트 건설공사의 여러 상품별(화공/발전/산업/환경) 프로젝트 사업을 관리했다. 이와 함께 설계, 시공 경험을 바탕으로 프로젝트의 계획을 수립하고, 공기(工期) 적정성 및 시공성을 사전에 검토하여 일정을 관리하고 원가를 관리하여 품질과 안전을 도모했다. 아울러 사전 리스크(risk)를 발굴하여 대책을 마련하고, 협력업체들을 관리하는 등 공사팀장/CM/PM의 업무를 두루 수행했다.
“꿈꾸던 직장에 들어간 이후로 성취감에 취해, 또는 성공만을 바라보며 성실하게 일만 해왔던 것 같습니다. 50대가 되어 인생을 돌아보니 일한 기억밖에 없네요.”
『엔지니어로 한 길 인생을 걸어온 지 35년.
전 세계 플랜트 건설에 앞장서며
때로는 이방인으로 비틀거리고 넘어지더라도
혼자서 걸어가야만 했던 길.
어릴 적부터 꿈꿔왔던, 가고 싶었던 길이었기에
멈출 수도, 가지 않을 수도 없었던 그 외길을
철마(鐵馬)처럼 달려왔다.』
그래서일까. 그가 오랫동안 일기장처럼 써온 SNS에는 기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뿌듯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허무하기도 한 심경이 곳곳에 묻어있었다. 혹시 본인이 걸어온 길에 일말의 후회라도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라고 답했다.
“프로젝트 매니저가 힘들긴 하지만, 그만큼 프로젝트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직업이에요. 그래서 ‘플랜트의 꽃은 PM’이라는 말도 있지요. 이 일을 꿈꾸고 지금까지 성취해온 모든 일에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위기 극복 & 손실 최소화에 ‘소방수’ 역할
‘바른 생활 사나이’의 표본 같은 이은희 씨의 생활신조는 ‘구체적이면서 실현 가능한 현실적인 계획을 세우고,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시키며 성장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성정 때문일까. 플랜트 건설 현장에서 그에게 소방수 역할이 맡겨질 때가 많았다.
신규 시장으로 진입한 발전 프로젝트들에서 야기된 건설 공기, 손익 차질 발생 등의 문제를 해결할 책임자로 이 씨가 선정되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신의 특기인 추진력과 끈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프로세스에 대해 공부를 하여 해당 프로젝트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또한 프로젝트 수행계획을 재수립하고, 대책 방안을 강구하여 위기를 극복하고 손실을 최소화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08년 5월부터 ’10년 12월까지 <알제리 정유 Rehabilitation & Adaptation of the facilities in Skikda Refinery Project(2.18B USD)>에 전기·제어 공사팀장으로 참여했을 때, 현장은 54개 Unit로 구성된 3개의 사이트로 구성된 약 3조 규모의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조직 500명, Labor 12,000명, 협력업체 54개 등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인력난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때문에 프로젝트 초기에는 이 씨가 전기/제어 공사발주, 현지 공사업체 발굴, 공사 일정 수립 등 공무팀장 업무도 병행해야 했다. 거기에 더해 설계 내용과 시공성(construct ability) 검토, 공기의 적정성, 협력사 공사관리, Risk Management 등의 업무까지 수행했다.
’10년 12월부터 ’12년 12월에 <바레인 Muharraq STP(하수처리장)/SIP(소각로)/Micro Tunneling(터널) 프로젝트>에 EM(Engineering Manager)과 PPM(Project Procurement Manager)으로 업무를 수행했을 당시에는 중동 ‘재스민 혁명’의 영향으로 설계지연이 발생하여 애를 먹었다. 그는 우선 설계인력을 아랍에미리트(UAE)로 이동시켜 설계 일정에 영향이 없도록 관리했다. 설계 완료 후에는 전기/제어 공사팀장으로 전환하여 현지 공사업체 발굴 및 일부 직영공사 수행 등의 시공관리 업무를 수행했다.
’13년 2월부터 12월까지 CM으로 참여했던 <Mexico Norte II CCPP(복합화력발전) 프로젝트>는 신규로 진입한 발전 시장이라 회사 입장에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산적한 문제들로 인해 전임자가 감당을 못하는 상황에서 이은희 씨가 추가로 투입되었다. 현장이 멕시코 내에서도 위험지역이라 주기기 엔지니어의 지원을 받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는 멕시코 현지의 발전 경험 엔지니어들을 채용하여 발주처가 요구하는 까다로운 시운전 업무까지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15년 2월부터 ’18년 12월까지 장장 3년간 PM으로 참여했던 <Saudi Aramco Cogen IPP(복합화력발전) 프로젝트>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임자가 해임되면서 후속 PM으로 부임하여 프로젝트 계약서 분석, 공정 관리, 손익 관리, 발주처 대응, 품질 및 안전 관리, 시운전 등 프로젝트 EPC 전체 사업을 관리했다.
“다들 어렵다고 회피한 프로젝트도 누군가는 책임지고 마무리를 해야 합니다. 위기가 닥칠 때마다 ‘난들 못할 게 무어냐’하는 생각으로 책임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애썼죠. 한편으로는 팀원들과 긴밀하게 소통하는 일도 중요했어요. 프로젝트의 가장 큰 리스크는 결국 사람이거든요. 사람 관계가 어려우면 쉬운 일도 힘들더라고요. 그런 소통하는 노력들이 쌓여서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히말라야 라르케피크(6249m) 등반 중. 이 씨는 지난해 4월 오랫동안 짝사랑해왔던 히말라야 만년설 등반에 도전했다.오랜 꿈이던 히말라야 등반에 도전
지난해 4월, 삼성 E&A에서의 정년 퇴임을 몇 개월 앞두고 이은희 씨는 오랜 꿈이었던 히말라야 등반에 나섰다. 10여년 전 멕시코 근무 당시 그는 ①성당 다니기 ②암벽등반 배우기 등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중국에서 근무하던 시기에는 현장에서 산악회를 조직해 직원들과 북경 인근으로 등산을 다녔을 만큼 평소 산을 좋아하던 그였기에, 가슴 속에 늘 암벽등반을 해보고 싶은 꿈을 품고 살았다. 성당은 현재 냉담(冷淡) 중이지만, 암벽은 꼭 오르고 말리라는 집념으로 ’22년 상반기 휴가 기간을 이용하여 한국등산학교에 입학해 암벽등반을 배웠다.
그리고 곧장 알프스로 가서 7월에 마터호른(4478m)을, 9월에 몽블랑(4807m)을 연이어 등정했다. ’23년 겨울에는 일본의 북알프스도 등반했다. 그리고 ’24년에 네팔의 라르케피크(6249m) 등반에 도전한 것이었다. 히말라야 만년설 등반을 위해 한창 훈련에 매진하던 시기,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설렘을 이렇게 쓰기도 했다.
『나에게는 오랫동안 마음으로만 불러왔던
길고 긴 노래가 있었다.
느지막이 산을 접하면서 남모르게 짝사랑하다
알프스를 거쳐 히말라야의 맑은 하늘과 만년설에
뒤덮인 하얀 설산까지 품게 된 애틋한 노래이다.』
짝사랑의 대상이던 히말라야를 등반해보니 어땠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히말라야 원정도 프로젝트 수행과 똑같았어요. 목표가 있고, 그 목표를 위해 함께 움직이는 조직이 있죠. 운행일정, 예산, 식단, 장비, 의약품, 리스크 관리 등을 사전에 철저히 검토하고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등반의 성공확률이 떨어지는 점도 같고요.”
철저하게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이은희 씨가 참여한 등반대는 라르케피크 정상에 끝내 오르지 못했다. 대원들의 히말라야 등반 경험이 부족했던 데다, 심각한 고소증세가 발병한 대원이 생기는가 하면, 미리 확인하지 못해 등반에 필수장비인 로프 부족 등 예상하지 못한 요소들이 겹친 탓이었다.
“여러모로 결과가 아쉽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귀한 경험을 쌓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놓친 부분들과 실수들을 복기해서 잘 정비하면 다음에는 성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또다시 ‘특급 소방수’로 임무 수행
인터뷰를 진행한 며칠 후 그는 사우디아라비아로 출국한다고 연락을 해왔다. 삼성 E&A 퇴임 후 곧바로 재입사한 ㈜삼영기업에서 사우디 PD(Project Director)를 맡아 또다시 ‘특급 소방수’로서 업무를 수행하러 간 것이다.
1994년 설립한 ㈜삼영기업은 전기공사 중 발전, 송·변전, 산업플랜트, 석유화학의 선두주자로 하이테크 및 전기자동차 2차전지, 태양광발전, 풍력발전 등 신재생에너지 산업 분야에서도 선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중견기업이다. 특히 플랜트 설계 분야에서 막강한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은희 씨의 설명이다.
“예전에 우리나라는 EPC(설계·조달·시공) 턴키 프로젝트 위주로 수행했는데, 이제는 베이직(Basic)까지 가능해졌어요. 국내 기업 중에는 이미 BEDD(Basic Engineering Design Data)를 수주해서 수행하는 곳도 있죠. 앞으로 플랜트 업계가 해결해야 할 숙제는 ‘탈(脫) 탄소화’일 것 같습니다.”
플랜트 전문가로서 업계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 씨는, 그 희망을 더욱 밝게 키우기 위해 오늘도 현장에서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을 터이다.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도대체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열정은 어디에서 솟는 것인지.
“지금껏 수많은 프로젝트를 수행해왔는데도 아직까지 ‘프로젝트’란 단어만 보면 설레고 가슴이 뜨거워져요.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호기심, 수행단계에서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을 때 느끼는 성취감과 보람. 그런 것들로 인해 프로젝트 수행이라는 매력에서 못 헤어나오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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