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역주민·지자체 님비(Nimby)에 막혀 전력수요 ‘비상’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입법 추진 시급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건립 등 첨단산업이 확산되며 전력수요가 급격하게 늘고 있지만, 전력망 확충 속도는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첨단산업은 신규 전력수요 충당을 위한 전력망 구축사업이 필수적인데, 송변전 설비를 ‘혐오시설’로 바라보는 지역주민과 지자체의 반대에 가로막혀 전력망 확충 사업이 지연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로 인해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 국가첨단산업단지의 적기 전력 공급에도 위기감이 감돌고 있는 가운데, 관련 업계 및 정치권에서는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등 관련법 입법 추진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정리 편집부
지난 9월 한전이 수립한 『제10차 장기 송변전 설비계획』에 따르면, 2036년까지 전력망에 56조5천억 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2023년 대비 2036년 전력망 설비 규모는 송전선로(3만5495C-㎞ → 5만7681C-㎞) 1.6배, 변전소(894개 → 1228개) 1.4배, 투자비(29조3천억원 → 56조5천억원) 1.9배다.
반도체 등 첨단산업 성장, 전기차 보급 등 전동화 확산, 신재생에너지 비중 확대 등 산업의 전환 흐름 속에서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가 책임지는 국가 송배전망 투자 규모는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전기를 만들어내는 속도보다 송전선로 확충이 늦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말은, 생산된 전기를 기업과 가정까지 실어나를 송배전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뜻이다. 전국 곳곳에서 전력망 건설이 지연되면서 첨단산업 생태계 약화 우려가 불거지고 있다.
전력수요가 증가하는 가운데 발전설비만 빠르게 늘고 송배전망 건설은 지지부진하면서 ‘병목 현상(Bottleneck effect)’이 심화되고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최악의 경우 전력 공급이 끊기는 ‘블랙아웃(대정전)’이 발생하거나, 저품질의 전기를 사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하남 동서울변전소 옥내화 사업 조감도 (제공: 하남시)
지역주민 방해·지자체 비협조로 공기 지연 빈번 전력망 건설 장기 지연의 대표적인 사례로 <345kV 북당진-신탕정 송전선로> 건설사업이 있다. 서해안 지역에서 만든 전기를 경기 남부지역으로 보내기 위한 이 프로젝트는 당초 2012년 6월 준공을 목표로 했지만 12년 넘은 현재까지 공사 중이다. 선로가 지나갈 예정인 지역의 주민들이 강력한 반대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345kV 당진화력~신송산(90개월) ▶345kV 신장성변전소(77개월) ▶500kV 동해안~신가평 HVDC(66개월) ▶345kV 신시흥~신송도 T/L(66개월) 등도 줄줄이 건설사업이 늦춰졌다. 최근 10년간 국내 발전설비가 55% 늘 때 송전망은 고작 9% 증가한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전에 따르면 345kV 가공선로 기준 표준 공기는 9년이지만 실제로는 13년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건설사업 추진 원천 반대와 입지선정위 운영 비협조로 인해 입지선정에만 평균 4~6년이 소요되고, 주민 열람·공고 및 설명회 거부와 관계기관 의견 회신 지연으로 사업 인허가에만 평균 3~4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더 큰 벽은 송전선로 시공이다. 지역주민 공사 방해와 지자체 시공 인허가 비협조로 평균 6년이 소요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한전이 지난 2022년 수립한 송변전 설비 신규 건설사업 112건 중 단 한 곳도 첫 삽을 뜨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정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이 입수한 한전의 『제10차 송변전 설비계획 추진 현황』에 따르면, 2024년 6월 말 기준으로 신규 착공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용역 설계·기초자료 검토 60건, 입지선정 단계 52건에 그쳤을 뿐이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전기 공급에도 차질 예상 최근 경기 하남시가 전자파 우려와 주민 수용성 결여를 이유로 동서울변전소 옥내화 및 증설 사업안을 불허하면서 제동이 걸린 ‘동해안~수도권 HVDC’ 건설사업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정부와 한전은 지난해부터 4조 원을 투입해 총 길이 280km의 송전선로 건설을 추진해 왔다. 동해안 지역의 전기 생산량은 최대 18GW인데 송전선로 용량은 11GW에 불과하다. 매년 신기록을 경신하는 폭염과 반도체, AI 등 첨단산업 확대로 수도권의 전력수요는 치솟고 있지만, 송전망이 부족해 지방에 발전소를 짓고도 놀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해안~수도권 HVDC’의 용량은 총 8GW로, 신가평변환소와 동서울변환소로 각각 4GW의 전기가 공급될 예정이다. 하지만 강원 지역 주민들의 반대로 5년 넘게 지연된 데 이어 최근 환경단체들이 행정소송을 내면서 사업이 표류하고 있다. 거기에 지난 8월에는 이 송전선로의 종점 역할을 하는 동서울변전소 증설을 두고 인허가권을 쥔 하남시까지 퇴짜를 놨다.
부지 19만8천732㎡, 연면적 6만4천570㎡ 등의 규모로 추진되는 옥내화 사업은 HVDC 변환설비 증설 등을 통해 수도권 및 하남의 안정적 부하공급 수행과 동해안의 발전력(4GW)을 공급받기 위한 HVDC 변환설비 증설 등이 목적이다. 초고압 송전망의 끝에 위치한 HVDC 변환소가 없으면 동해안~수도권 송선전로는 사실상 무용지물이 된다. 현재 조성 중인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전기 공급에도 차질이 예상된다.
동해안~수도권 송전망 사업은 한전이 2026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해온 국책사업이다. 강원도는 수도권 전력난 해소를 위한 국가적 사업을 위해 발전소를 짓고 송전탑까지 설치했다. 그런데 한전과 업무협약까지 맺었던(2023년 10월) 하남시가 돌연 업무협약 해지와 함께 ‘사업 불허’ 결정을 내린 것이다. 변전소가 대규모 거주 단지인 감일신도시 및 다수의 교육시설과 접해 있는 데다 주민 반발이 크다는 이유였다. 이에 한전 측은 행정소송을 고려하고 있는데, 소송을 진행하는 동안 공사 지연에 따른 손실이 연간 3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2013년 7월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린‘우리가 밀양이다’탈핵희망문화제에서 밀양 765kV 송전탑 반대대책위원회 주민들이 송전탑 반대 구호를 외치고 있다. (출처: 노동자연대)
주민 건강권 위해? 설득력 있는 근거 부족 하남시가 주민 건강권을 내세우고 있지만, 설득력 있는 근거는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혐오시설을 일단 거부하는 전형적인 ‘님비(NIMBY, Not In My Backyard) 행태’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 사업은 변전소 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현행법상 주민 동의가 꼭 필요한 것이 아닌 만큼, 지자체가 주민 반대를 명분으로 나서서 사업의 발목을 잡을 권리가 없다. 때문에 “선거를 위해 주민의 표를 의식한 정치적 계산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하남시의 결정이 근거 없는 주장이라는 증거는 또 있다. 하남시는 한전이 주민 의견 수렴 없이 증설 계획 및 입지를 확정하는 등 『전원개발 촉진법』을 어겼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전 측은 주민설명회를 7차례나 개최했다고 반박했다.
또한 한전은 전자파의 경우, 거리와 반비례해 100미터만 떨어져도 1만 분의1 수준으로 감소하기 때문에 주택단지까지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게다가 옥내화로 기존 전자파 평균값의 55%를 줄일 수 있고, 대형 송전탑을 철거하고 상부에 조경녹지를 36% 늘리면 미관상으로도 크게 개선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한전은 지난 8월 한 언론사의 입회하에 보안시설 ‘나’급인 변전소에 일반인이 가장 근접할 수 있는 울타리 앞에서 전자파를 측정하기도 했다. 측정 결과 0.0791μT(마이크로테슬라)로 일상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자레인지에서 발생하는 전자파(2.921μT)의 2.7%에 불과했다. 국내 기준치인 83.3uT의 0.09% 정도 수치다.
변전소와 가장 가까운 곳인 아파트 단지 입구(직선거리 200m)에서는 0.0214uT로 측정되면서 “변전소 전자파 영향이 아파트까지 도달하기 어렵다”는 한전 측의 주장에 무게가 실렸다. 동서울변전소 사업 완료 시 여건이 비슷한 고덕변전소에서 50m 떨어진 아파트 단지에서 0.083uT로 측정된 결과치도 공개했다. 한전은 “시민들의 오해와 불안감을 불식시키기 위해 언제든 전자파 측정에 응하겠다”는 방침을 표명했다.
‘전자파 포비아, 민원 제기, 소송 남발’ 숙제 일각에서는 이처럼 송배전망 사업 속도가 느려지는 것은 밀양 송전탑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은 2007년 울산 울주군 신고리원전에서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에 보내기 위해 밀양을 지나는 765kV 송전탑 건설 계획을 추진함에 따라 그해 밀양 주민들이 반대 집회에 나서면서 시작됐다.
정부는 주민 반대에도 2014년 6월 행정대집행을 통해 반대 주민 농성장을 철거한 후 송전탑을 세웠다. 현지 주민들은 공사를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전력이 주는 합의금도 받지 않았다. 나아가 시민단체들과 연대하여 탈핵 운동에 앞장섰다.
당시 환경 운동권이 앞장선 반대 시위에 ‘전자파 괴담’이 확산된 바 있다. 최근 전국 곳곳 송배전망 공사 현장의 전자파 괴담이나 각종 민원 제기, 소송 남발도 그로부터 이어져 나왔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여기에 지자체들이 민원 제기를 이유로 인허가를 무한정 지연시키니 민간 공기업인 한전이 자력으로 감당하기는 버거운 상황이다.
 덕이동 데이터센터 건축허가 부지와 불과 50m 거리에 있는 아파트 단지에 내걸린 현수막 (출처: 고양신문)
데이터센터 33곳 중 절반 이상 건립에 차질 빚어 한편, 주민 반대와 지자체의 비협조로 몸살을 앓는 건 데이터센터도 마찬가지다. 경기 고양시는 지난 8월 덕이동 데이터센터의 착공 신고를 최종 반려했다. 주민들이 데이터센터 건립을 반대하는 이유는 전자파와 소음, 열섬 현상, 고압선 매립에 따른 건강 위협이다. 업계는 데이터센터의 전자파 영향이 미미한 수준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24시간 365일을 가동해야 하는 시설물 특성상 인체에 어떤 영향을 줄지 쉽게 단정할 수 없다는 게 주민들의 주장이다.
문제가 된 덕이동 데이터센터 사업지는 반경 500m 안에 거주하는 아파트 주민이 5000가구에 이른다. 사업자인 GS건설 측은 데이터센터에서 발생하는 전자파가 가정용 전기밥솥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소명했지만, 전자파 유해성을 앞세운 주민들의 반발을 넘어서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일산동구 사리현동 벽제초등학교 인근에서도 지난해 8월 데이터센터 건립이 조건부 승인을 받은 것이 확인되어 지역 사회가 반발하고 있다. 비슷한 이유로 김포시는 3년 전 건축 허가를 내준 데이터센터에 대해 최근 착공을 불허했다. 이처럼 수도권에서 인허가를 받은 데이터센터 33곳 중 차질을 빚고 있는 곳이 절반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력망 특별법 입법 추진에 대한 요구 커져 한전이 추진하는 사업에 지자체가 반대하고 나서면 사업을 추진하기 어렵다. 전력 수급의 미스 매치와 전자파 포비아는 한전이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 때문에 인허가와 보상 등에서 특례를 강화하는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입법 추진에 대한 업계와 정치권의 요구가 커지고 있다. 중앙정부가 직접 합리적 보상 방안을 마련해 주민 갈등을 중재하고, 지자체와 각 부처로 나뉜 인허가 절차를 일원화해 전력망 구축 속도를 높일 토대를 서둘러 갖춰야 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이 법안은 21대 국회에서 발의됐지만 회기 종료로 자동 폐기되면서 처리되지 못했고, 22대에서도 법안 소위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반도체 클러스터, 데이터센터, 전기차 등으로 급증하는 신규 전기수요에 대응하고 탄소중립 목표에 맞는 신규 발전설비 확보를 위해서는 국회가 「국가기간 전력망 확충 특별법」 입법이라는 숙제를 먼저 해결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Energy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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