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속가능한 방폐물 관리는 우리 세대의 사명입니다” 정재학 한국방사성폐기물학회 제11대 회장 2050 탄소중립 목표달성을 위한 에너지믹스에서 전 세계적으로 원자력발전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지리적 여건상 재생에너지 자원이 풍부하지 않은 우리나라 또한 원자력과 함께 LNG 등의 화석 연료를 활용하여 에너지믹스를 구성하고 있다. 최근 발표된 제11차 전기본 실무안에서도 SMR을 포함한 신규원전 4기를 건설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실무안이 공개되기 이틀 전인 5월 29일,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특별법이 21대 국회에서 폐기되었다. 한국방사성폐기물학회 정재학 회장을 만나 고준위 특별법 법제화에 관한 향후 대책과 지속가능한 방사성폐기물 관리에 관한 해법을 들어보았다.
정리 편집부 자료제공 정재학
정재학 회장(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은 학부에서 화학을 전공했지만, 이후 진학한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원자력공학에 매료되어 원자력공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에서 20여 년간 방사선규제단장, 방폐물 규제실장, 방폐물 안전연구PM, 법령기술실장 등을 역임했다. 방폐물 안전분야 전문가로서 그간 국무조정실 주요 정책과제 자문위원(원자력안전위원회), 한국원자력학회 학술이사, 국제원자력기구 방폐물 안전기준위원회 위원,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에너지환경전문위원 겸 원자력·핵융합 소위원장, 원전해체글로벌경쟁력강화협의회 공동회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방사성폐기물학회에서(이하 ‘학회’)는 학술이사, 총괄연구분과 위원장, 학술지 편집위원, 직전 2년 부회장 등을 두루 역임하다가 올해 1월부터 회장을 맡았다. 임기는 2년이다.
 방폐물학회 이사회의를 주관하고 있는 정재학 회장 (사진 가운데)
한국방사성폐기물학회에 대한 간략한 소개 방사성폐기물과 사용후핵연료에 관한 학술발전과 기술교류를 위해 2003년에 설립되었고, 현재 3,523명의 개인과 69개 법인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양한 학·연·산 전문가들이 서로 교류하고 연구결과와 학술정보를 공유함으로써 관련 지식을 확장하고 실제 산업에 적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봄·가을 개최되는 학술발표회에는 1,000명 가까운 회원이 참석해 약 430여 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하고 있다.
우리 학회는 △핵주기 정책·규제 및 비확산 △사용후핵연료 처분 전 관리 △고준위 폐기물 처분 △중·저준위 폐기물 관리 △제염해체 △방사선 환경 및 안전 △방사화학 등 7개 연구분과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중 사용후핵연료 처분전 관리, 고준위 폐기물 처분 연구분과가 고준위 특별법과 직결된다. 정부의 정책이나 에너지계획에 변동이 있을 때마다 대응하는 분과가 다른데, 지난해 원전 해체가 이슈화됐을 땐 제염해체 분과가 가장 바빴다.
 방사성폐기물 특별법 추진 과정 (제공: 정재학)
고준위 특별법이 왜 필요한가? 고준위 방폐물 사업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장기간 체계적이고 안정적으로 추진되어야 할 사업이지만, 우리나라는 정치적 상황에 크게 영향을 받아 계속해서 지연되고 있다. 2016년 고준위방폐물관리 기본계획(1차) 수립 후 시행도 못 해보고 2차 기본계획을 수립했는데, 시점만 순연되었을 뿐 ‘부지 내 저장(한시적) → 중간저장 → 영구처분’이라는 3단계 관리절차는 동일하고 기술적인 차이도 없다. 그러나 ‘탈원전 vs 원전확대’ 등 정치적 입장으로 끊임없이 다투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원전은 발생자, 관리사업자, 원전 주변 주민들과 여러 지방자치단체, 중간저장·처분시설 부지선정 과정 참여 지자체 및 주민 등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참여하고 다단계의 의사결정 과정이 필요한 사업이다. 때문에 법적인 근거와 함께 명확한 ‘게임의 룰(rule)’이 필요하다. 이 절차가 없다면 잠재적으로 극심한 사회적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법제화 실패 원인은 뭐라고 보는가? 사용후핵연료 관리는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하는 첫 단계부터 고민했어야 하는 의무이고, 원전에 대한 찬성과 반대를 떠나 현실의 문제다. 고준위 특별법은 원자력 발전국으로서 소위 원자력 유산(Nuclear Legacy)에 대한 기본적인 의무를 다하는데 필요한 법률이다. 그런데 이를 ‘원전의 계속운전을 금지하고 원전 이용을 축소 또는 중단케 하는 수단’으로 삼으려 했던 일부 정치적 의도가 입법 실패의 근본 원인 중 하나라고 본다.
마지막까지 쟁점으로 남았던 ‘부지 내 저장시설 용량’ 이슈는 ‘설계수명’ ‘계속운전’ 등의 용어에만 매달려 정작 본질을 놓치고 말았다. 적법하게 허가받은 원전의 안전한 운영과 해체에 필요한 ‘부지 내 저장시설 용량’을 확보하는 것이 핵심인데 말이다. 원전 운영과정에서 발생할 사용후핵연료를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저장용량(습식과 건식을 모두 포함) 확보뿐 아니라, 이후 해체과정에서 습식저장조를 철거할 때 기존에 보관 중이던 사용후핵연료를 옮겨 저장할 수 있는 건식 저장용량이 충분할지도 정확하게 따져 보았어야 했다.
이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이해관계자들이 다양한 에너지원의 적정 구성비를 논의할 수 있는 장을 따로 마련하고, 특별법은 원자력 도입국으로서 책무를 이행하기 위한 법률로서만 논의해야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핀란드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영구처분시설 개념도
다른 나라의 법제화 진행 상황은 어떤가? 핀란드, 스웨덴, 프랑스, 스위스, 미국, 캐나다, 일본, 독일 등 원자력 선도국 대부분은 대형원전 도입 직후 방폐장 법제화에 착수했다. 현재 방폐장 건설이 가장 빠른 핀란드의 경우, 1977년 상업운전에 들어가는 동시에 방폐장 타당성 조사를 실시했고 1983년에는 원칙을 결정하고 부지조사에 착수했다. 이후 2001년에 부지를 선정하고 2015년에 건설허가를 받았다. 나머지 국가들도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의회가 작용하거나 관련 법안이 만들어져 부지선정에 착수한 상태다. 입법부가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나라는 2016년에서야 처음으로 사용후핵연료 처분에 관한 기본계획을 세웠을 뿐이다.
고준위 방폐물 처분기술은 어떤가? 현재 우리나라의 고준위 방폐물 처분기술 수준은 선도국 대비 60% 정도라고 본다. 선도국은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 방폐장 법제화에 착수할 때부터 이미 관련 기술을 연구하고 또 추진해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1997년부터 R&D만 해왔다. 시작이 늦었으니 다른 나라와 기술 격차가 있는 게 당연하다.
지난 2월 원자력진흥위원회에서 「고준위 방폐물 R&D 로드맵」을 의결했다. 정부가 제시한 로드맵에 따라 고준위 방폐물 운반·저장, 부지평가 및 처분기술 개발과 실증에 집중하고, 잠재적인 처분 대안기술로서 부피·독성저감 기술확보도 추진해야 한다. 함께 보고된 「원전산업 경쟁력 강화방안」에 따른 원전 해체 글로벌 경쟁력 강화와 중·저준위 방폐물 처분 안전성 강화를 위한 전략적 기술개발과 관련 분야 고급 기술인력 양성도 필요하다.
우리 회원들 중에는 이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한 이들도 있고, 대부분은 이 과제와 무관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우리 학회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이 프로젝트에 함께할 계획이다.
SMR에 대한 방폐물 전문가로서의 제언 최근 전 세계적으로 치열한 차세대 원자로 기술개발 경쟁 속에서 국내에서도 혁신형 소형모듈원전(i-SMR)을 포함해 SMART, MSR, VHTR, 특수목적 히트파이프 원자로 등 다양한 노형의 차세대 원자로 개발이 추진되고 있다. 과거에는 개발된 원자로를 운영하면서 별 고민 없이 방폐물을 먼저 발생시켰고, 방폐물을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한 고민은 뒤로 미루어 왔다.
방폐물의 ‘先발생 後관리’로 대표되는 기존 원전에서의 시행착오를 또 반복하면 안 된다. 과거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 이제는 차세대 원자로 기술과 함께 처음부터 최적 후행핵연료주기 기술과 해체 용이성 설계기술을 함께 확보해 ‘지속가능 에너지기술’로서 세계시장에서 초격차 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또한 국내에 복수의 고준위 방폐물 심층처분시설을 확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고려할 때, 현재 고려 중인 고준위 방폐물 관리 시스템 내에서 차세대 원자로 발생 고준위 폐기물의 기술적·사회적 수용성을 적기에 확인할 필요가 있다. 고준위 특별법이 22대 국회 1호 법안으로 발의되었다
‘공론화 → 기본계획(정책) 수립 → 특별법안 발의 → 국회 임기만료로 자동폐기’라는 루틴이 벌써 두 번째 돌았고, 22대 국회가 출범한 지 채 보름 남짓 지난 지금(인터뷰 날짜인 6월 14일 기준) 벌써 3건의 고준위 방폐물 특별법안이 발의되었다. 이젠 습관이 되어버린 건 아닌지, 22대 국회에서 세 번째 루틴을 또 반복하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지난 21대 국회에서는 여·야 모두 필요성에 공감해 각각 법안을 발의했고, 상임위에서 11차에 걸쳐 10여 건의 쟁점을 모두 해소했다. 원전 지역주민·지자체를 포함해 대부분의 이해관계자들도 특별법에 동의해 법안 통과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이미 오랜 기간 충분히 논의하고 검토한 사항이므로, 22대 국회에서는 21대 국회의 합의 내용에 근거하여 조속하게 법제화를 추진하는 것이 타당하다.
 고준위 특별법의 필요에 대해 역설하고 있는 정재학 회장
조속한 법제화를 위한 학회의 전략은? 21대 국회의 논의과정을 지켜본 결과, 처음부터 다시 원점에서 논의하자는 일부 주장이 있을 수 있겠다는 우려도 든다. 하지만 그건 시간과 예산을 낭비하는 일인 한편, 너무나 무책임한 일이기도 하다. 20대 국회에서처럼 여·야 의원이 모두 참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거나, 여·야 의원이 함께 특별법을 발의한다면 법안 통과가 수월할 거라고 본다.
이와 함께 21대 국회에서 실패했던 근본 원인을 분석하고 교훈을 도출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면, 22대 국회에서 법제화가 조기에 이루어졌을 때 시행착오를 줄이면서 성공적으로 추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 학회는 지난 21대 국회 때와 마찬가지로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공청회 등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으로 조속한 입법을 촉구할 계획이다.
앞으로의 계획이나 포부는? ‘지속가능한 방사성폐기물 관리’는 우리 세대에게 맡겨진 사명이고, 그 전제조건은 ‘세대 간 공평’과 ‘세대 내 공평’이다. 명실공히 ‘방사성폐기물 싱크탱크’로서 우리 학회는 과학기술적 혁신을 통해 미래세대의 안전을 담보하여 ‘세대 간 공평’ 문제를, 국민과 다양한 이해관계자 소통을 통해 견고한 신뢰를 구축하여 ‘세대 내 공평’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설 것이다.
또한 방사성폐기물 종류별 처리, 저장, 운반 및 처분 관리 등 단계별 안전성을 강조해 왔던 전통적인 ‘개별적 접근’의 틀에서 벗어나, 모든 방사성폐기물의 요람(발생)부터 무덤(최종 관리단계인 처분)까지 전 과정 원활한 흐름에 기반한 ‘통합적 접근’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위해 학회의 역량을 집중해나갈 계획이다.
<Energy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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