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전기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이 따낸 26조원 규모의 체코 두코바니 신규원전 수주가 계약을 하루 앞두고 현지 법원 결정에 따라 돌연 중지되었다. 프랑스 국영전력공사(EDF)가 “자국의 입찰 기회가 부당하게 박탈되었다”며 행정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체코 브르노 지방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며 “공정성을 위해 계약을 중단한다”고 가처분 결정을 내리면서 한수원의 계약이 전격 중지된 상황이다.

5월 6~7일 일정으로 체코 현지에서 열리는 신규원전 본계약 체결식에 맞춰 출국한 안덕근 산업통상부 장관을 비롯한 우리나라 정부 및 국회 합동 대표단은 현지 공항에 도착하고서야 계약 중단 소식을 접한 것으로 알려졌다. 산업부에서는 곧바로 “계약의 최종 무산은 아니며, 일정이 지연된 것 뿐”이라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지만, “사전 정보 부족으로 인한 외교 실책”이라는 비판은 피할 수 없었다.

2024년 7월 체코 신규원전 사업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후 페트르 피알라 체코 총리와 악수하고 있는 황주호 한수원 사장(왼쪽) (출처 : 한수원)

한수원의 체코 원전사업은 두코바니 원전 단지 내 1000MW급 원전 2기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로, 총사업비는 약 4천억 코루나(한화 약 25조4천억원)에 달한다. 체코 정부는 지난해 7월 두코바니 원전의 우선협상대상자로 한수원을 선정했으며, 이후 테멜린 신규원전에 대한 우선협상권도 한수원에 부여했다.

당시 최종 사업자 선정에서 밀려난 EDF가 이처럼 마지막까지 몽니를 부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복수의 관계자 및 전문가들은 “유럽 원전시장의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 한국의 유럽 원전 수출을 저지하려는 프랑스의 전략적 시도”로 분석하고 있다. 유럽 한복판에 짓는 신규원전을 한국에 내줄 수 없다는 자존심 싸움인 동시에, EU 회원국끼리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힌 산물이라는 것이다.

프랑스의 이 같은 행보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3년 테멜린 원전 수주 당시, 체코는 미국의 웨스팅하우스, 러시아 아톰스트로이엑스포르트, 프랑스 아레바(EDF 자회사로 편입) 등과 경쟁 입찰을 진행했다. 당시 아레바는 입찰 요건 미달로 실격됐지만, 이후 법원에 이의를 제기하며 장기간 소송이 이어졌다. 체코 정부는 이듬해 정치적 부담 및 소송 리스크 등을 이유로 테멜린 3·4호기 건설을 백지화한 바 있다.

『APR1400』 개발 연혁

우리나라는 1987년 초 착수된 한빛 3·4호기 건설사업과 연계하여 원전 건설 기술자립을 추진한 결과, 한울 6호기까지 총 6기의 한국표준형 원전(KSNP)을 건설함으로써 명실공히 1,000MW급 원전의 건설기술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개선형 한국표준형 원전(OPR1000)으로 준공한 신고리 1·2호기, 신월성 1·2호기와 함께 신형경수로원전(APR1400)인 새울 1·2호기, 신한울 1·2호기 그리고 현재 건설 중인 새울 3·4호기가 있다. 해외에서는 바라카 1,2,3호기가 상업운전을 개시했으며 4호기는 건설 중에 있다.

한수원은 2009년 아랍에미리트 원전사업을 시작으로 이집트 엘다바 원전 2차측 건설 및 기자재 공급 계약 체결, 체코 신규원전사업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폴란드 신규원전 건설 협력의향서(LOI) 체결 등 원전사업 수출 포트폴리오를 완성해나가고 있다.

『APR1400』 설계 단면도 (제공 : 한수원)

『APR1400』은 전 세계 원자력 산업의 미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국내기술로 개발한 전기출력 1,400MWe의 신형 가압경수로(PWR)이다. 한국표준원전(OPR1000)의 설계, 건설, 운영 및 정비를 통해 축적된 경험과 기술을 기반으로 신개념 기술을 도입하여 안전성, 경제성, 운전 및 정비 편의성을 향상시켰다. 처음에는 KNGR(Korean Next Generation Reactor)라고 부르다가 이제는 『APR1400』이라 부른다.

프리스트레스트 콘크리트 구조물이며 설비용량은 1,400MWe(4,000MWth)이다. 발전소 설계수명은 60년이며, 연료 재장전 주기는 18개월, 내진 설계기준은 0.3g(SSE)이다. 이용률은 평균 90%에 달하며, 불시 정지 횟수는 연간 0.8회 이하다. 노심 손상빈도1)는 10-5/RY 이하, 원자로 건물 파손빈도는 10-6/RY 이하이다.

『APR1400』은 2017년 9월 유럽사업자요건(European Utility Requirements, EUR) 인증심사를 통과했으며, 2018년 9월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표준설계인증(Design Certification, DC)을 취득하여 세계적으로 안전성 및 기술 우수성을 인정받은 한국형 원전이다.

『APR1400』 안전주입계통 (제공 : 한수원)

한국형 원전 『APR1400』은 세계 최고 수준의 안전성과 효율성을 갖추고 있다. 첨단 설계의 특징으로 ▶안전주입계통(SIS) ▶원전계측제어시스템(MMIS) ▶원자로 건물 내 재장전수탱크(IRWST) ▶일체형 원자로 상부구조물(IHA) 등을 꼽을 수 있다.

▶ SIS : 단순화 및 계열별 다중성 설계 개념을 적용하여 기계적으로 4개의 독립된 계열로 구성했으며, 안전주입탱그(SIT) 내 피동형 유량조절장치를 설치했다. 게다가 원자로 건물 내 IRWST 설치 및 안전주입계통의 원자로 용기 직접주입방식을 채택하여 발전소 안전성을 향상시켰다.

▶ MMIS : 디지털 계측제어 설비 및 컴퓨터 기반의 주제어실을 갖췄으며, 대형 디스플레이 패널 및 전산화된 운영 절차서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워크스테이션 고장 시 안전운전을 위한 안전제어반이 설치되어 있으며, 다양성 및 심층 방호설계로 고도의 안정성과 신뢰성을 확보했다.

▶ IRWST : 핵연료 재장전수를 저장하는 IRWST는 안전주입계통, 정지냉각계통, 원자로 건물 살수계통 냉장제의 공급원이다. 급속 감압 또는 방출 및 주입 운전 시 가압기로부터 방출되는 유체 냉각원이기도 하며, 중대사고 발생 시 노심용융물에 의한 콘크리트 파손 완화를 위한 원자로 공동 침수 계통의 냉각재 공급원이다.

▶ IHA : 원자로 용기 상부 헤드 영역에 설치된 복잡한 모든 구성요소를 통합함으로써 계획예방정비 소요기간 단축 및 정비 편의성 향상에 따른 정비종사자 피폭선량을 저감한다.

한편, 이와 함께 구조물 미설비의 모듈화, 상부 반입 방식(Over the Top Method, OTM), 3차원 설계검증 시스템 등의 첨단 설계가 더해졌다.

체코 두코바니 신규원전 사업에 공급할『APR1000』의 조감도 (제공 : 한수원)

『APR1400』은 그 모체라고 할 수 있는 OPR1000에 비해 안정성을 한층 강화했다. 주급수계통 기능 상실 시 원자로 냉각재 계통의 열 제거를 위해 증기발생기에 급수를 공급하는 보조급수계통(AFWS)이 4계열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4계열 다중설계 적용으로 공간성 4계열로 분리 배치하여 안정성과 신뢰성을 확보했다.

또한 발전소 정지냉각 동안 가압기 살수가 불가능할 때 원자로 냉각재계통을 감압하는 안전감압배기계통(SDVS)이 적용되었으며, 항공기 충돌에 대처하여 설계되었다. 정전사고 시에는 비상 디젤발전기, 대체 교류발전기, 배터리 용량 증대, 이동형 발전기 등 비상전원체계가 가동된다.

중대 재해사고 발생 시에는 원자로 외벽을 직접 냉각함으로써 노심용융물을 원자로 용기 내에서 냉각하고 억류하는 설비(IVR-ERVCS)로 갖춰져 있고, 핵분열생성물 누설을 억제하고 노심용융물-콘크리트 간 반응을 완화하는 원자로 공동 충수계통(CFS)도 작동한다. 원자로 건물 내 평균 수소농도를 10% 이하로 유지하는 수소완화계통(HMS)과 원자로 건물에 물을 뿌려 냉각시켜서 온도와 압력을 줄일 수 있는 살수보조계통(ECSBS)도 작동되고 있다.

체코 두코바니 신규원전 사업에 공급하는 한국형 원자로의 노형은 『APR1000』이다. 당초 두산에너빌리티를 주축으로 한 ‘팀코리아(Team Korea)’는 『APR1400』을 제시했지만, 체코 측의 전력 상황과 기술 요건을 만족시키기 위해 『APR1000』으로 공급 노형을 변경했다. 『APR1400』과 『APR1000』의 차이는 설비 용량만 1400MW급에서 1000MW급으로 줄었다는 점이다. 설계수명(60년), 가동률(90%), 노심 손상빈도, 열적 여유도 등에서는 같은 특성을 지녔다.

『APR1000』의 설비 용량은 한국보다 전력 사용량이 적은 체코 측의 요구에 따라 맞춤형으로 개발됐다. 한수원은 핵연료를 이용해 열을 생산할 때 원자로 안에 들어가는 핵연료의 숫자를 줄이고, 원자로에서 생산된 열을 스팀으로 만들어주는 데 들어가는 튜브 수를 줄이는 방식 등으로 설비 용량을 축소했다.

한수원은 2016년부터 유럽 요건을 적용하는 중형급원전 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목표로 『APR1000』 설계 개발을 추진해왔으며, 2023년에 최신 EUR 요건 기준으로 설계 인증을 취득했다. 한수원 측은 “『APR1000』은 유럽 수출을 목적으로 국제원자력기구(IAEA), 서유럽규제기관협회(WENRA), EUR의 최신 기술 기준을 반영해 개발된 노형”이라며 “EUR 인증을 취득해 기술성이 입증됐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22년 10월 웨스팅하우스는 “『APR1400』 및 『APR1000』에 자사의 기술이 적용됐기 때문에 미국 정부의 수출통제 대상이 된다”는 이유를 들면서 한수원을 상대로 특허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해당 소송은 한수원이 승소하였으나 웨스팅하우스는 이에 반발해 항소했다.

그러나 지난 1월 한수원이 체코 원전 수주와 관련하여 웨스팅하우스와의 협의 과정에서 향후 『APR1400』 수주 시 웨스팅하우스 측에 8억 달러의 일감 보장, 지적재산권료 1.5억 달러 지불 등의 조건들을 순순히 수용하면서 논란이 다시 불거졌다. 사실상 한수원이 주장한 “독자 수출 가능”이라는 말을 뒤엎은 것이다. 관련 특허 소송도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이번 협의로 향후 소송에서 불리한 위치가 되었다.

한국과의 합의에 만족한 것일까. 최근 웨스팅하우스는 한수원의 체코 두코바니 원전 수주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웨스팅하우스는 5월 14일 “두코바니 원전은 체코에 막대한 경제적 이익과 에너지 독립성을 가져다줄 것이며, 본사는 지난 1월 협정에 따라 한수원의 프로젝트 수행을 지원하겠다”고 지원사격을 펼쳤다. 이번 두코바니 원전 건설사업에서 일감 일부를 확보하려는 전략으로 분석된다.

이번 법적 분쟁은 프랑스 EDF가 한수원의 두코바니 원전 입찰 과정에서 EU 외국보조금규정(FSR)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며 시작됐다. 체코 법원은 계약의 유효성 여부와는 별개로 EDF의 문제 제기에 대한 법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체코 발주사 EDUII와 한수원은 체코 최고행정법원에 금지 명령 해제를 요구하며 5월 19일과 20일 각각 항고를 제기했다. 통상 6~8주 내에 내려지는 체코 법원의 판결에 따라 이르면 이달 안에 계약 체결 여부가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만약 항고심에서 가처분 효력이 취소되면 본안 소송과 관계없이 곧바로 계약 체결이 가능해진다.

1) 원전에서 노심이 녹아내리는 중대 사고가 발생하는 빈도로, 원전의 안전성을 평가하는 중요한 지표 중 하나이다. 과거에는 1만 년에 한 번 정도의 빈도(10-4/RY)를 기준으로 설계했으나, 최근에는 10만년에 한 번 정도(10-5/RY)로 기준이 강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