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지털 치료 시대에서 본 영화 <이터널 선샤인> 힘겹고 고통스런 기억. 그 기억은 때론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병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잊혀지지 않는다면 그 기억을 지우고 싶어진다. 영화 <이터널선샤인>(2004, 미셀 공드리)은 기억을 지워 고통을 잊고 싶은 한 남자의 이야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주인공의 입장에서는 이 치료는 끝내 실패한다. 마치 사랑은 기억되지 않고 마음에 남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기억을 지웠음에도 상대방을 만나게 되면 또 다시 끌리게 되는 마력. 사랑은 과학으로도 풀리지 않는 마력을 가지고 있다. 영화가 만들어지고 나서 20년이 지난 지금 영화 주인공과 비슷한 이유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면 기억보다는 마음에 초점을 맞춰보라고 권고하고 싶다. 이번 호에서는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통해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 ‘디지털 치료제’를 다뤄보고자 한다. 글 편집부
자료 다음영화, IBS 영화 <이터널 선샤인> 포스터 (출처: 다음영화)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속 한 장면. (출처: 다음영화)조엘(짐 캐리 역)와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역)은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서로 다투게 되는 일이 많아지면서 그들의 사랑은 끝난다. 그렇지만 헤어짐이 너무 고통스러웠던지 두 사람은 각자 기억을 지워준다는 ‘라쿠나사’라는 곳을 찾아 서로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치료를 받는다. 먼저 기억을 지운 쪽은 클레멘타인이고, 헤어지고 나서 다시 그녀를 찾은 조엘은 새로운 연애를 시작하려는 장면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하게 된다. 클레멘타인은 잊은 걸까. 그는 우연히 그녀가 기억을 지운 것을 알게 되고 자신도 라쿠나사를 찾아간다.
영화의 스토리는 시간의 순서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조엘의 단편적인 기억들의 무작위적인 나열로 전개된다. 둘은 무한히 행복했다가 곧바로 최악의 상황까지 치닫는 장면이 연속된다. 두서없고 맥락도 없이 툭툭 던져지는 구성은 마치 우리의 기억은 그렇게 우습다고 말하는 듯하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영화로서는 쉽지 않은 구성인데, 이 영화가 최고의 로맨스 영화로 꼽히는 이유는 숏컷으로 보여주는 서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과 대사가 굉장히 강렬하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이 덕분인지 영화는 계속 물음표를 던진다.
영화 속 한 장면. (출처: 다음영화)“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모르고 있네요.”
클레멘타인의 진정한 매력은 지루한 일상에서 꺼내줄 것 같은 성격이다. 마치 불타는 운석이 흥미진진한 다른 세계로 데려다 줄 것처럼. 집과 직장밖에 모르는 소심한 성격의 조엘은 자신과 다른 점에 매력을 느낀다. 상처받기 쉬운 성격의 그녀는 뭔가 활동적으로 항상 무언가를 하지만 사실은 마음이 편안하기만 하면 좋다. 예측할 수 없고 어지러운 사랑 이야기는 영화 마지막에 잘 정리된다. 마치 연애가 끝나고 나면 정리가 되듯이.
기억이 지워진 채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라쿠나사에서 상담받으며 상대방에 대해 이야기했던 모욕적인 말들을 담은 녹음테이프를 듣게 된다. 서로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두 사람. 당황스럽고 어색하다. 클레멘타인 급하게 조엘의 집을 나서며 “우리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정말로 모르고 있네요.”라고 말한다. 집을 나가는 그녀를 불러 세우는 조엘은 왜냐고 묻는 그녀에게 머뭇거리며 “몰라요. 그냥 기다려요. 그냥 잠깐만 기다려줘요”라고 대답한다. 흥분한 상태로 지긋이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을 카메라는 번갈아 잡아준다. 그리고 이제 다 알겠다는 듯 감격한 표정으로 서로 마주 본다.
그녀는 “완전하지 않아요. 마음의 평화를 찾으려는 망가진 여자일 뿐이죠.” 그는 “완벽하지 않다고요.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을 찾을 수가 없어요.” 다시 그녀는 “곧 거슬리게 될 테고 난 지루하고 답답해 하겠죠. 나랑 있으면 그렇게 돼요.”하고 말한다. 그러자 조엘은 “괜찮아요”라고 말한다. 영화는 이대로 과연 해피엔딩일까.
기억을 지운 후 다시 만난 두 사람에게 녹음 테이프를 전달한 사람은 라쿠나사의 직원인 메리(커스틴 던스트 역)다. 메리는 라쿠나사 소장인 스탠과 관계를 이어갔다. 기억을 지운 후에도 메리는 여전히 스탠에게 끌리던 차에 우연히 자신이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억을 지우는 연구는 결국 실패했고 그 일이 과연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어서 기억을 지웠던 사람들에게 녹음 테이프를 보냈다.
기억을 지우는 일은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공지능(AI)의 4차산업혁명 시대다. 실연, 상사병, 우울증,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심리적·정신적 질병을 치료하는데 약물이 아닌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시대가 됐다. 기억과 관련된 뇌과학 분야 연구도 상당히 발전됐다.
실연의 고통도 너무 깊어지면 치료받아야 할 병이 된다. 기억과 관련해 실연의 고통은 PTSD 또는 트라우마로 분류될 수 있다. 영화에서처럼 과거 사랑했던 연인을 잊기 위해 극단적으로 기억을 지울 수는 없다. 하지만 뇌과학과 첨단 디지털 기기를 이용해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 결국 고통의 기억은 ‘마음’에 달렸다.
조엘이 기억을 지우기 위해 머리에 기계를 쓴 장면 (출처: 다음영화)
클레맨타인의 모습 (출처: 다음영화)기억보다는 ‘마음’을 치료해주는 디지털치료제 실연의 고통과 흡사한 PTSD 심리치료법 기전은 어떤 것일까. PTSD 치료법에는 장시간 노출, 인지처리요법, 안구운동 둔감화 및 재처리(EMDR) 등이 있어왔다. 기초과학연구원(IBS)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은 EMDR 치료요법의 효과를 동물실험으로 처음 입증해 국제학술지 ‘네이처’ 2019년 2월 14일자에 발표했다.
연구팀은 고통스러웠던 상황의 기억으로 공포 반응을 보이는 생쥐에게 EMDR 기법을 사용하면 행동이 얼어붙는 공포 반응이 빠르게 감소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EMDR은 환자가 공포기억을 회상하는 동안 눈동자를 좌우로 움직이게 만드는 시각적 운동을 하도록 해 정신적 외상을 치료하는 기법이다. 한 번 공포기억이 줄어든 쥐는 시간이 지난 뒤 다른 장소에서 비슷한 상황에 처해도 공포 반응이 재발하지 않았다.
2019년 기초과학연구원(IBS) 인지 및 사회성 연구단이 PTSD 심리치료법 중 하나인 안구운동 둔감화 및 재처리(EMDR) 기법의 분자생물학적 기전을 밝혀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출처: GIB, IBS)
연구팀은 EMDR 기법에 작용하는 뇌 신경회로도 발견했다. 쥐에게 안구운동을 유도했을 때 시각적 자극을 받아들인 ‘상구(안구운동과 주위 집중을 담당하는 부위)’에서 시작해 공포기억을 억제하는 ‘중앙 내측 시상핵’, 공포 반응에 작용하는 ‘편도체’가 차례로 관여했다.
이는 그간 경험적으로만 확인됐던 심리치료 기법의 원리를 동물실험으로 입증한 결과다. 그간 정신과에서 활용되는 심리치료법은 정확한 원리를 몰라 도외시되는 경향이 있었는데 과학적 원리가 입증되며 널리 활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최근에는 디지털 치료제를 통해 PTSD를 극복하기도 한다. 가상현실(VR) 기반으로 PTSD를 치료하려는 시도가 대표적이다. 외출이 힘든 광장공포증을 가진 환자에게는 일상생활을 재구성한 VR을 체험하게 하거나, 교통사고 환자에게 실제 사고와 유사한 가상체험으로 트라우마를 완화하는 식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정신의학과 연구팀은 2022년 4월 ‘게임체인지(gameChange)’라는 VR 프로그램을 공개한 바 있다. 환자는 VR 장비를 착용한 뒤 가상의 세계 안에서 치료사의 안내를 받아 다양한 미션을 수행한다.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시뮬레이션 안에서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며 공포감을 극복할 수 있다.
연구팀은 광장공포증을 가진 환자 346명을 모집해 174명에게는 일상치료와 VR치료를 병행하도록, 172명에게는 일상치료만 받도록 한 결과 6주 후 VR치료를 병행한 그룹에서 광장공포증이 더 많이 줄고 불안장애가 감소했다고 밝혔다. 옥스퍼드대 연구팀이 제작한 PTSD 치료법 ‘게임체인지’의 한 장면. 게임체인지는 가상현실(VR)을 이용해 환자가 미션을 수행하면서 공포기억을 치료할 수 있다. (출처: 옥스퍼드대, IBS)
이성과 감정, 과학과 마음 사이 최근에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각종 불안장애·공포증을 치료할 수 있게 됐다. 대기업을 중심으로 임직원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앱을 이용한 디지털 치료제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한다. 해당 디지털 치료제 이름이 ‘마음정원’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자.
마음정원은 사용자 스트레스 수준을 디지털 바이오마커(HRV)로 측정해 사용자 감정 수준에 따른 맞춤형 솔루션을 제공한다. 스마트폰으로 제공되는 대화형 임상설문과 디지털 바이오마커 동시 측정으로 우울, 불안, 불면, 적응, PTSD, 자살·자해 충동 등 6개 정신질환을 선별한다. 또 근로자 직무 스트레스를 측정한다. 대화형 임상설문을 하는 동안 사용자의 눈동자 움직임을 추적해 감정을 파악한다.
디지털치료기기 사용 흐름도 (출처: 보건복지부)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지만 수많은 SF영화에서 보이듯이 큰 재난을 가져올 수도 있다. 고통을 잊기 위해 기억을 조작하는 것도 일종의 재난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 <이터널 선샤인>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얘기하는 것 같다. 사랑도 기억에 저장되면 쉽게 왜곡되고 상할 수 있다는 것을 감독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영화의 두 주인공처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편안하게 갖도록 하는 것이 좀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이 아닐까.
<Energy 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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